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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편집실

[정부수립 60주년]1부-현대사 60년의 주인공들:(1)노동자

  • 변태섭
  • 조회 : 16125
  • 등록일 : 2008-09-17
[정부수립 60주년]1부-현대사 60년의 주인공들:(1)노동자
입력: 2008년 08월 03일 19:03:35
 
ㆍ건설노동자 황태순씨
ㆍ“부두·사우디…70평생 뼈빠진 막노동”

황태순씨(73)는 왼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뇌졸중의 후유증이다. 허리는 다소 굽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양쪽볼은 움푹 파여 있었다. 첫 대면에서 받은 인상만으로도 칠십 평생 그가 살아온 인생 행로가 보였다. 그를 지난달 22일 대구 방촌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났다. 농사일에 염증이 나 1968년 32세에 건설현장 막노동을 시작한 이래 2005년 70세까지 평생을 쉬지 않고 노동을 한 대가로 그가 얻은 것은 여전한 가난과 뇌졸중이다.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담맘항 근로자 숙소 내부에서 찍은 모습.
1935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12세 때 하나뿐인 누나를 독감으로, 18세 때는 둘째 형님을 폐병으로 잃었다. “병원에서 황소 한 마리를 팔면 병을 고친다고 했는데 아부지가 그거 애껴가 낸중에 자식 물리줄라꼬 하다가 요새 같으면 병도 아닌 걸로 먼저 보냈다 아이가.”

그가 막노동을 하며 살아온 38년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81억달러에서 1조달러에 육박하고 국가는 경제규모 세계 13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초고속 성장은 국가의 몫이지 황씨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늘 고단했다.

● 지게 소리만 들어도 넌더리 난다

해방 이듬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황씨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다. “비행기가 반짝반짝하면서 20~30대가 올라가더라고. 와 올라가는지 열흘 있다가 알았어.” 그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지만, 국가나 그 누구도 그에게 알려주지도 않았고 그를 보호해주지도 못했다. 51년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후 학교 문턱을 가보지 못했다. “어무이가 큰형님 사범학교 시킨다고 너는 양보해라 캐서, 요새 같으면 양보 안 하지.”

국민학교를 마친 황씨에게는 “지게 소리만 들어도 넌더리가 날 정도”의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벼, 조, 목화, 메밀, 감, 담배, 황기 등 곡식과 약초를 가리지 않고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농사가 싫어 공장일을 할까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공장에 갈라캐도 전쟁 직후라 공장이 어딨노. 부산에 고무신 공장이 있었지만 기술도 없고, 빽도 없어서 안되데. 그래가 어쩔 수 없이 농사 쭉 짓다가 군대 갔지.”

● 돈 써서 들어간 막노동 현장

1956년, 동네 사진관에서 친구들과(가운데).
61년 군에서 제대한 황씨는 동향 출신의 손천봉씨(68)와 그해 12월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신혼방을 차린 군위에서 첫째아들 광영씨(45), 둘째아들 진영씨(43), 외동딸 영옥씨(41)를 낳았다. 막내아들 원영씨(37)는 대구로 이사간 후 태어났다.

군위에서 자식 셋을 낳자 농사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렵다고 느꼈다. 고향을 떠났다. 68년 친척 누님이 살던 대구 신암동에 월세를 얻어 이사했다. 동대구 역사 건물이 지어지던 시기다. 그곳에서 그가 평생해야 하는 막노동을 시작했다.

근로조건은 열악했고 임금은 형편없었다. “하루 일당을 얼마나 받았나카면 250원이거든. 그때 쌀 한 섬에 2만5000원 했으이 벌어도 버는 기 아니었지. 새벽 4시30분에 가야 삽이라도 잡지 아니면 일 못하는기라.”

동대구역 공사장에서 자갈, 모래, 시멘트를 섞고 전봇대 세우는 일을 보조하면서 약 1년간 일한 뒤 70년 대한통운에 입사했다. “거 들어갈 때 소 한 마리 팔아가 드갔다카이. 보리쌀 한 섬에 5000원 할 때 내가 5만원 주고 들어갔으이 보리쌀 10섬이다 10섬.”

돈을 주고 들어갔지만 노동 강도는 동대구역 공사장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황씨는 대구역에서 철도 운송 화물을 하역하며 시멘트를 짊어지고 날랐다. “정말 중노동이라. 시멘트 한 포대에 42㎏이거든. 그런데 열차 한 대에서 내리는 시멘트가 1250포대거든. 우리 집채만 하다카이. 그걸 고마 한 사람한테 맡기는기라. 첨 가서 메면 어깨 벗겨져 가지고 피도 나고 참말로 힘들었데이.”

일은 힘들었지만 가끔은 직원들과 부부동반 나들이도 나갔다. “한번은 회사 계모임으로 공원에 간 적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사에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말하는 구관조가 있어서 참말로 신기했는기라.”

1961년, 결혼사진.
대한통운에서 근무하면서 황씨는 인사비리를 저질러온 직속상사를 수사기관에 고소하며 법정 소송을 하기도 했다. 소송이 시작되자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에서 압력도 들어왔고 황씨는 경찰 조사도 받았다.

“중정하면 벌벌 기던 시절 아이가. 부정 저지른 놈은 가마이 놓아두고 나만 괴롭히는 거야.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말 죄다 거짓이더라.” 숱한 외압에도 불구, 결국 황씨는 소송에서 이겨 분회장을 몰아냈지만 자신을 따르던 50여명의 직원들이 해고될 것을 우려해 자진해서 회사에 사표를 냈다.

● 창살 없는 감옥 사우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78년에는 중동 취업 바람이 한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잘 살아보세’라는 기치 아래 건설회사와 물류회사들에 중동 진출을 권유했다. “우야든동 애들 공부는 시킬라고 사우디로 가기로 결심한 거 아이가.” 사우디 가서 일하는 것도 돈을 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월급이 12만원이었지만 사우디 가면 40만~50만원 벌으이 30만~40만원의 돈을 쓰고 서로 갈라캤다.” 하지만 대한통운에 근무할 때 작업 실력을 인정 받아 돈을 쓰지 않고 사우디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사우디 담맘항으로 몸이 옮겨갔지만 하는 일은 똑같은 하역일이었다. 바뀐 게 있다면 열차가 아닌 배에서 짐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로조건은 더 나빠졌다. “시멘트 싣고 온 배의 화물칸 깊이가 12m란 말야. 근데 만지다보면 미끄러져가 고마 시멘트가 그 밑으로 떨어지면서 거기 빠지는 거야. 그라마 다시 내리가서 꺼내 와야지 우야노. 날은 덥긴 덥제. 50㎏ 시멘트 포대 꺼낼라카이 엄청나이 힘들었다. 담맘 부두가 배 대는데 길이로 보자면 12㎞는 된다. 왔다 갔다 하는데 얼마나 힘드노. 또 그 작업이 위험한 게 시멘트를 보통 50포대씩 올리는데 한 조에 둘이 들어가 하거든. 그렇게 올리는데 앞조에서 어디 걸리면 고마 50포대가 한꺼번에 다 떨어지는기라. 이건 뭐 폭탄 한가지라. 그래가 떨어지는 시멘트 포대에 맞아 죽은 사람도 많아.”

1973년, 경북 구미 금오산에서 부인과 함께
그는 한국에서 땅을 살 정도로 꽤 많은 돈을 벌었지만 사우디 생활은 악몽 같았다.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카이. 중간에 한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1년 이상 근무하지 않으면 비행기 값을 물어줘야 한다캐서 꾹 참고 있었구마.”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사람은 없제, 일은 많제. 우야노. 시키는 대로 해야지. 윗사람에게 대들 생각조차 못했다카이. 중간에 꾸뻑 졸다 걸리면 욕이나 직싸게 묵고 그랬지.” 한 달에 1~2번 주어지는 외박은 ‘여가 시간’이 아닌 ‘자는 시간’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사우디에는 안 가겠다고 한다. “사우디에서 돈 벌어봤자 번 표시가 안 나더라고. 사우디 4번 갔다 온 친구는 마누라가 바람이 나 돈 다 때리 먹어 뿌고 아파트도 다 팔아먹고 그랬지. 참 그땐 그런 게 많았어.”

● 70세까지 멈추지 않은 노동

81년 사우디에서 귀국했다. 그 사이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영구집권할 것 같았던 박 대통령은 암살당했고, 그 자리를 또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이 차지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늘 그게 그거였다. 여전히 생계의 벼랑 끝에서 살아가야 했다. 농기구 회사, 섬유 회사, 가구 회사 등을 전전했다. 그에게는 박정희·전두환보다 97년 외환위기의 기억이 생생하다.

1976년, 대구역사 공사장 근무 중 놀러갔을때.
“내가 다니던 가구 회사에서 봉급이라며 6개월짜리 어음을 줬는데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그 어음이 휴지조각이 됐다카이.”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살아갈 날은 아직 많았다. “입에 풀칠은 해야겠다”는 심정에서 호텔 경비 자리를 어렵게 얻어 60만원의 월급으로 생활을 했다. 그것도 오래 하지 못하고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하청업이 어떤 건지 그도 몸으로 겪었다. 2002년 67세에 그 회사를 나왔다. 은퇴할 나이를 넘겼다. 그러나 그는 벌어 놓은 돈이 많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계속 일을 해야 했다. “몸이 성한데 와 쉬노. 쉬면 누가 밥 먹여주드나.” 그 나이에 건축 현장에 나가 미장도 하고 모래통도 짊어졌다. 공공근로에도 나갔다.

그러나 2005년 뇌졸중에 걸린 이후 일을 그만뒀다. 생활은 여전히 어렵지만, 더이상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그가 막노동을 시작할 무렵 9만원에서 지난해 207배 증가한 1863만원이 됐지만,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뇌졸중에 걸린 자신을 탓하고 있다. 한때 국가는 그를 산업전사로 호명하며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나 산업전쟁에서 부상하고 병들고 늙은 그에게 국가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보상은커녕 국가는 경제대국이 되어야 한다며, 다시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 가난하고 늙은 전사의 말을 들어보자.

“산업전사는 뭐꼬. 그냥 먹고 살기 바쁘니께 한 거지. 나라가 잘살게 됐다니께 다행이지만 내는 이 모양 이꼴 아이가.”

1976년, 직장에서 경남 합천 해인사로 놀러갔을 때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근무 중 하계 휴양지에서


<글 선근형·사진 김정근기자 ssun@kyunghyang.com>
<취재협조 |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


■ 노동자 황태순 연보

1935년(1세) 경북 군위군 효령면 출생
1951년(15세) 국민학교 졸업. 농사일 시작
1958년(22세) 군 입대.
1961년(25세) 전역. 동향의 손천봉씨와 결혼
1968년(32세) 동대구역 신축 공사장에서 막노동
1970년(34세) 대한통운 취직, 대구역 열차 화물하역 담당
1979년(43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하역작업 인부
1981년(45세) 귀국. 농기구·섬유·가구 회사 등 근무
1997년(61세) 외환위기로 회사 부도. 6개월치 월급 떼임
2002년(67세) 호텔 경비원, 자동차 부품회사 근무
2005년(70세)~현재 뇌졸중. 일 손 놓음.

제목아이콘이미지  댓글수 1
admin 변태섭   2008-09-17 13:11:48
이번 8월 15일은 광복절과 건국절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광복.건국절 논란을 보도했지만
은 다르게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국가"를 따지기에 앞서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관점으로 접근한 게 신선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한 개인의 삶 속에서 드러낸 것 역시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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